끌어당김의 법칙의 미래의 현재화는 미래를 창조하는가?
미래의 현재화의 미래 창조
[질문] 끌어당김의 법칙은 미래는 현재화 즉 현존의 삶을 살아감으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가능한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이 제기하신 질문은 시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신적 존재와 인간 의식의 현존성에 관한 철학적 · 종교적 · 과학적 사고의 교차점에 놓여 있습니다. “미래를 현재화 한다”는 개념은 단순한 자기계발적 은유가 아니라, 시간과 존재, 의식, 신앙의 깊은 층위를 다루는 신비적-존재론적 주제입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구조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미래의 현재화란 무엇인가?
먼저 생각할 것은 '미래의 현재화'가 무엇이냐 입니다. ‘미래의 현재화(presentification of the future)’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지금 이 순간에 감각하고, 확신하며, 마치 일어난 것처럼 경험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상상(imagination), 확신(conviction), 기대(expectation), 믿음(faith)이 작용하는 의식의 창조적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현재의 정서, 행동, 선택, 사고방식을 앞선 미래에 맞추는 적극적 실천을 의미합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이것을 핵심으로 삼습니다.
“원하는 미래를 지금 느껴라. 그러면 그 진동이 같은 것을 끌어당긴다.”
그렇다면, 이 개념이 종교적 · 과학적 세계관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탐구해 보겠습니다.
2. 불교의 시간관: 찰나와 공空의 논리
불교에서는 시간은 고정된 흐름이 아니라 연속적 찰나의 집합입니다. 모든 존재는 ‘찰나생찰나멸’(刹那生刹那滅), 즉 지속 없이 매순간 생겨나고 사라지는 법으로 설명됩니다. 즉 시간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실재가 아니라, 마음이 창조하는 개념입니다.
- 과거도 기억에 의해 구성되는 의식의 흔적입니다.
- 진짜 실재는 지금 이 순간(현존, 지금-여기)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이미지를 지금 내 의식에 실현하는 것, 즉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을 현재 감정으로 느끼는 행위는, 그 자체로 존재에 흔적을 남기고 업을 형성하는 창조적 행위입니다. 이는 끌어당김과 매우 유사한 구조입니다.
미래는 오지 않았지만, 마음은 지금 그것을 만들고 있다. – 유식학(唯識學)의 핵심 관점
3. 양자물리학의 시간 개념: 확률과 의식의 개입
두 번째는 양자물리학의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시간은 고정된 직선이 아니라, 가능성의 파동함수로 존재합니다. 관측이 일어나기 전까지, 현실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관측(의식의 개입)에 의해 파동은 붕괴되고, 하나의 현실이 선택됩니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이 동시에 가능하지만, 관측하는 순간 하나로 결정됩니다.
- 현재란 확률 분포 속에서 하나의 현실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미래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의 파동이고, 그 중 어떤 것을 현실화할지는 지금 어떤 진동(감정, 생각, 행동, 관점)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논리는 “우주의 파동에 나의 진동을 맞춘다”는 끌어당김의 법칙과 구조적으로 동일합니다.
물론, 과학계에서는 이것을 '심상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지만, 메타포와 인식론적 유비로는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즉 양자역학이 그것은 증명하지는 않지만 은유적으로 충분히 예측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1935년에 제안한 사고실험입니다. 양자역학의 이상함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이 실험은, 고양이를 상자 안에 넣고, 상자 안에는 방사성 물질, 방출을 감지하는 장치, 독극물 병이 함께 들어 있는 구조입니다. 만약 방사성 원자가 붕괴되면 장치가 작동해 독극물이 방출되고, 고양이는 죽게 됩니다. 그러나 원자가 붕괴되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아 있게 됩니다. 문제는 양자역학에서는 원자의 상태가 붕괴와 비붕괴의 중첩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측자가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고양이는 동시에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상태로 간주됩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양자 세계의 중첩 개념을 일상 세계에 적용했을 때 생기는 논리적 모순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슈뢰딩거는 이를 통해 양자역학의 해석이 얼마나 직관과 멀리 있는지를 비판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양자역학을 매우 잘 설명하는 비유가 되고 마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4. 기독교 종말론과 ‘지금 여기’의 신학
세 번째 근거는 기독교적 세계관, 좁혀서 종말론적 시간관을 통해 충분히 증명이 가능합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단순한 시간의 끝 예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시간’이 인간 시간 안에 침입하는 사건적 이해입니다. 이는 ‘카이로스(kairos)’라는 신학적 시간개념으로 설명됩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마 4:17). 미래의 나라가 현재로 돌입한 것입니다.
- “이미-아직”의 긴장: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사이에 삽니다.
- 종말이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안에서 하나님이 개입하는 실재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미래의 구원을 현재에서 미리 살아내는 능동적 선택입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이것은 곧 미래를 현재화(presentification)하는 정의입니다.
또한 당신이 말하신 대로, 하나님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만을 사시는 분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אהיה אשר אהיה)”에서 잘 드러납니다.
- 'אהיה(Ehyeh)'는 미래형으로도, 현재진행형으로도 해석됩니다: “나는 존재하는 자다”, “나는 곧 존재할 자다.”
- 따라서 하나님은 현존(Presence)이며, 우리가 ‘지금 여기’에 머무를 때, 가장 깊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살지 못하면, 그는 믿음이 없는 것이며, 실제로 그런 사람은 미래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현재가 미래이고, 미래가 현재입니다. 이것인 기독교의 현존적 삶의 방식입니다.
5. 그렇다면 끌어당김의 법칙은 신학적으로 가능한가?
답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물질주의적인 끌어당김(예: “차, 돈, 명예를 끌어오자”)는 신학적으로 부적절합니다.
- 그러나 믿음으로 미래를 앞당기고, 현재를 재해석하는 태도는 기독교 신학과도 부합됩니다.
믿음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미래를 지금 여기에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끌어당김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고 사는 현재의 삶입니다.
6. 결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마음이 흐른다
- 불교는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이며, 마음이 현실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 양자물리학은 “미래는 확률이고, 의식이 하나를 선택한다”고 말합니다.
- 기독교는 “하나님은 현존하시는 분이며, 믿음은 미래의 실재를 지금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끌어당김의 법칙은 이 세 가지를 합쳐서 “지금 그 미래를 진짜처럼 느끼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현재의 마음 상태가 현실을 바꾸는 문이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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