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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군 초평면 지명유래

@지식창고 발행일 :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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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군 초평면 지명유래입니다. 이곳의 글은 충남 진천군 홈페이지를 참조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본래의 글을 원하시는 분은 아래의 링크로 가시면 됩니다. 

 

 

 

용정리(龍亭里)

 

생곡(生谷)마을

 

초평면 소재지 마을을 생곡이라 한다. 이 마을이 형성되기는 약300여 년이 되었으며, 60여 호에 경주 이씨들이 대성을 이루고 있다. 경주 이씨 9대조의 호가 생곡(生谷)이었으므로 그 후 마을명이 생곡으로 불리어오고 있다 한다.

 

양촌(陽村)마을

 

임진왜란(1592년) 당시 원정(遠征) 온 이여송(李如松)이 풍수지리(風水地理) 학자 두 사총을 시켜 "어디다 진(陳)을 치면 이길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두 사총이 시킨 진지에서 그만 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여송이 두 사총을 처형하려 하자 경주 이씨 11대 이시발(李時發)이 이여송 장군에게 "두 사총이 고의로 패하게 한것이 아니고 아군의 전세(戰勢)가 약해서 패한 것이니 두 사총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수차 건의하였고 두 사총을 살피었다. 두 사총은 생명의 은인인 벽오(碧梧) 이시발에게 보답할 길을 찾다가 묘소(墓所)를 잡아 주었다. 그 묘소가 바로 지전마을 뒷산이며 와우형(臥牛形ㆍㆍㆍ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었다. 이 묘소에서 앞을 내다보면 시냇물이 흐르고 건너편에 양지바른 곳이 있다. 바로 여기가 양촌마을이다. 그리하여 볕양(陽)자와 마을 촌(村)자를 써서 양촌이라 하였다. 약 100여 호에 마늘단지로 유명하다.

 

지전(芝田)마을

 

약 400여 년 전 경주 이씨가 5가구 정도가 이 마을에 입주하여 살아 왔다. 이 지방의 지형이 와우형(臥牛形)이라 한다. 즉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소는 첫째 물과 풀이 있어야 살기에 지초지 또는 잔디지(芝)자와 밭전(田)자를 써서 잔디밭을 연상하여 지전이라 한것이 오늘에 이른다. 약 60여 호에 경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고 쌀과 마늘 인삼이 특산물이며 하천과 옥토로 지전의 풍요를 기약하고 있다.

 

부창(夫昌)마을

 

경주 이씨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이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는데 부창이 뒷산을 상속해 주기로 하였다. 딸에게 이르기를 천자문(千字文)에 나오는 부창부수(夫唱婦隨)하라 하고 교훈(敎訓)하였다. 부창부수란 지아비(남편)가 창도하면(뜻을 이루고자 하면) 지어미(아내)는 그 뜻을 따르라는 뜻이다. 이에 연유하여 동명을 부창(夫唱)이라 하더니 부창(夫昌)으로 변하였다. 약 50여 호에 마늘 특산지로 유명하다.

 

오갑리(五甲里)

 

영신(永新)마을

 

약 90년 전 밀양 박씨 5가구가 마을에 이주(移住)하여 임야(林野)를 개간하고 화전민처럼 생활하여 오던 중 병술년 장마로 인하여 인근 마을에서 지대가 높은 영신마을으로 20여 호가 이주하여 현재는 30호의 새마을을 형성하고, 동명은 새동네라 칭하게 되었다. 마을민은 일치단결하여 새살림의 터전을 마련하고 오래오래 새동네로 만들자고 마을명을 길 영(永)자 새 신(新)자를 써서 영신이라 하였다. 본군 새마을 청소년회(4H) 발생지이며, 우수한 청소년회 운영은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원대(院垈)마을

 

원대마을을 원터라 한다. 옛날(조선시대)에 공무(公務)를 띄고 여행하는 관원(官員)들을 위하여 국가 경영의 여관을 두었는데 거기에서 원주(院主)를 두어 운영하게 하였다. 원주는 흔히 승려(僧侶)를 임명하였기때문에 원(院)의 가까운 곳에는 으레 절이 있기 마련이다. 이 원은 후대에 와서는 일반 여행자도 받았으며, 뒤에 주막(酒幕)으로 변모하였으며 여관의 전신(前身)이 된다. 지금도 원각(院閣)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원이 있던 자리이기에 원터, 원대(院垈)라 한다. 원(元)은 영제원(永濟院)의 원대(院垈)가 되는 것이다. 약 50호에 미곡과 고추가 주산물이 된다.

 

영주원(永周院)

 

원(院)의 제도에 관해서는 원대마을에서 논하였고, 우리 진천 관내에도 옛날에 진천읍에 시재원(時才院)ㆍ광혜원(廣惠院)ㆍ문백면 태락리에 태랑원(台郞院)ㆍ백곡면 갈월리 서수원(西水院) 마을에 협탄원(脇呑院) 그리고 본동에 영제원(永濟院)이 있었다. 이 원을 운영하기 위한 인원과 소요경비를 충당하는데 역의 제도와 비슷한 감독기관을 두었다. 뒤에 여인숙으로 변하고 주막으로 변모하여 오고가는 길손들이 이 곳에서 쉬어가며 술도 마시곤 하였다. 특히 경상도 선비들이 과거길에 이 곳을 많이 왕래하였다고 하며 영제원(永濟院)이 영주원(永周院 永酒院)으로 변하여 부르게 되었다. 현재 80여 호 가구에 주산물은 미곡과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마두(馬頭)마을

 

마두마을을 말머리라 한다. 옛날 방조라 하는 사람이 해너머 고개 훈련장 씨름판재에서 자기 애마(愛馬)가 화살보다 빠른 천리마(千里馬)라고 자랑을 하였다. 그러나 동료들은 아무려면 화살이 빠르지 말이 빠르냐고 언쟁을 하다 결국 시합을 하게 되었다. 시합장소는 씨름판재에서 말머리 동네까지였다. 큰 구령과 함께 동료는 활을 당기고 방조는 말을 타고 달렸다. 비호(飛虎)같이 달려와 화살을 찾으니 눈에 뜨이지 않는다. "아차… 화살보다 늦었구나." 판단하고 칼을 들어 자기 애마의 목을 쳤다. 나중에 살펴보니 화살은 말 꼬리에 박혀 있지 않은가? 억울하게 천리준총(千里駿聰…훌륭한 말)만 잃고 말았다. 이에 연유하여 말머리라는 동명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40여 호 가구에 주산물은 미곡과 고추이다.

 

영구리(永九里)

 

죽현(竹峴)마을

 

죽현마을을 댓재라 한다. 거금(距今) 약 500년 전에 반남 박씨가 최초로 이주(移住)하고 그후 양성 이씨가 와서 살게 되었으며 경주 김씨가 새로 와서 같이 터전을 잡아 현재까지 이르렀다. 동명은 마을에 대나무밭이 우거져 동명을 댓재(竹峴)라 하였다. 지금도 마을 뒷산에 대밭이 있다. 또한 동네가 대죽같이 길게 형성되어서 담뱃대를 물고 담배를 피우는 형국이라하여 죽현이라 명명되었다는 설도 있다. 30여 호에 마늘 고추 담배가 특산물이다.

 

점촌(店村)마을

 

댓재와 하영마을 사이에 몇집이 있다. 이 곳을 점촌이라 하는데 옛날에 이곳이 토기를 만들던 곳이어서 점촌이라 일컬어 현재에 이른다.

 

영구(永九)마을

 

약 500년 전에 노승(老僧)이 지나가다가 마을민과 환담을 하던 중 노승이 동명을 영구물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당시 경주 최씨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노승의 말을 따라 영구물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이 지형이 복구형(伏龜形), 즉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영구물(永龜勿)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약 80여 호에 뒷마을을 상영(上永), 아래 마을을 하영(下永)이라 칭한다. 경주 최씨, 밀양 박씨, 고령 신씨들이 대성을 이루고 있다. 담배, 마늘, 고추가 특산물이다.

 

어은(漁隱)마을

 

약 500여 년 전에 경주 최씨가 처음 터전을 잡고 살아 왔으며, 그 후 경주 이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 마을의 형국이 고기가 숨어있는 형국이라 하여 어은(漁隱)이라 한다. 약 30여 호에 고추, 마늘이 특산물이고 남방 약 1.5km 지점에 고려 태종 때(서기 918년) 증통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영수암이란 사찰이 있으며 이 절에서 보관중인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4호인 괘불(掛拂)이 있다.

 

신통리(新通里)

 

용동(龍洞)마을 용동마을을 황골이라 한다. 약 500여 년 전에 진천 송씨가 황골에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광산 김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현재는 광산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 입구에서 용이 등천(登天)하였다고 하여 용동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음성군의 주봉천(住鳳川)과 현촌천이 합류하여 벼루재 앞을 지나 용동마을 앞을 굽이굽이 돌아 초평천에 이른다. 항시 맑은 물이 흐르고 여름이면 기암계곡(奇岩溪谷)에 피서객이 줄을 잇는다. 용동마을 동남방 2km 지점 벼루재 밑에 의적(義賊) 임꺽정(林巨正)이 은신하였다는 임꺽정굴이 있다. 이 근방에는 천렵 장소로도 유명하다.

 

※ 임꺽정(林巨正…일명 거정 이라고도 함)은 양주(楊州)의 백정(白丁)으로 약으면서도 담대하였다. 당쟁으로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고 사회질서가 어지러웠을 때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불평분자를 규합, 1559년(명종 14년)부터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官衙…관청)를 습격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백성의 재물을 무리하게 빼앗아 먹는 못된 높은 벼슬아치)를 잡아 죽이고 창고를 털어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장연(長淵), 옹진(甕津), 풍천(豊川) 등지에서 관군(官軍)의 토벌을 당하였으나 백성들의 내응으로 이를 피하고 한때는 개성(開城)에 들어가 포도관(捕盜官)이 억근(李億根)을 죽이기로 했다. 이듬해 형 가도치(加都致)가 체포되고, 참모(參謀) 서임(徐林)이 서울에서 잡혀 투항하자 점차 세력이 위축되던 중 1562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구월산(九月山)으로 철수 항전 끝에 잡혀 사형되었다. 그에 관한 많은 설화와 역사소설이 있으며 명종실록에는 그의 이름이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적혀 있다. 우리 진천에서도 용동마을에 은거하면서 덕문이를 중심으로 이월 옥정이 고개와 백곡 엽둔재를 거점으로 안성방면으로 노략(擄掠)질을 하려 왕래하였다고 한다.

 

삼선(三仙)마을

 

삼선마을을 토꼴이라 한다. 약 300여 년 전에 평해손씨(平海孫氏)가 처음으로 내주(來住)하여 현재 33호 중 30호에 평해손씨가 거주하고 있다. 토질(土質)이 우수하다 하여 토꼴이라 한다. 또한 산수가 수려하고 인심이 후덕하다 하여 산과 물과 인심의 세가지를 따서 삼선(三仙)이라 한다. 앞내 이름도 군자천(君子川)이라 한다.

 

상통(上通)마을 상통마을은 음성군 맹동면 통동리(通洞里)와 경계하고 있다. 상통마을을 진천말(鎭川末)이라 한다. 진천의 말단에 위치하여 진천말이란 이름이 붙었다. 약 30여 호에 고추, 마늘, 담배가 특산물이다.

 

금곡리(琴谷里)

 

수문(水門)마을

 

수문마을을 서원말이라 한다. 서원말이란 서원이 있었기에 연유된 말이다. 현 초평 초등학교 자리에 지산서원(芝山書院)이 있었다. 지산서원은 전후 여덟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최석정(崔錫鼎, 1646 - 1765)을 제향(祭享)하던 곳이다. 최석정이 향리(鄕里)인 금곡리에서 제자들을 모아 교육사업으로 여생을 낙(樂)으로 삼을 당시 석정이 세운 태극정(太極亭) 뒤 석벽(石壁)에 각자(刻字)한 옥천병(玉川屛) 세자가 지금도 초평 초등학교 뒤 석벽에 남아 있어 당시를 회상(回想)하게 한다.

 

쓰레꼴마을

 

서원말에서 내를 따라 한참 내려오면 쓰레꼴이란 동네가 있다. 이는 지형이 쓰레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쓰레꼴이란 이름이 붙은 근래에 생긴 마을이다.

 

진암리(陣岩里)

 

진동(陣洞)마을

 

진동마을을 우군(右軍)이라 한다. 거금(距今) 430년 전에 곡산 연씨(谷山延氏)와 임천 조씨(林川趙氏)가 내거(來居)한 마을이다. 우군(右軍)이 승리한 진(陣)터이기에 동명을 우군이라 하고 뒤 산세가 진지(陣地)를 친 모양 같다하여 진동이라 한다. 약 70여 호에 미곡을 생산하고 있다.

 

사곡(蛇谷)마을

 

사곡마을을 뱀골이라 한다. 옛날에 뱀이 많다하여 뱀골이라 하였다. 약 390여 년 전에 경주 김씨가 정착하여 세거(世居)하고 있다. 약 40여 호에 경주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은암리]

 

구정벼루마을

 

구정벼루마을은 구정승(九政丞)을 지낸 묘지(墓地)가 있다하여 구정벼루라 한다.

 

청양(淸陽)마을

 

청주에 양와절이 있었다. 그 청과양을 따서 청양이라고 동명을 붙었다 한다. 이 곳에 오상초등학교가 있다.

 

가죽(加竹)마을

 

옛날부터 주민들의 성격이 송죽(松竹)보다 더 강직(剛直)하다 하여 가죽(加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산직(山直)마을

 

산직마을을 산직말이라 한다. 산직말은 전국 도처에 많이 있다. 옛날 산을 지키던 분이 살았기 산직말이란 이름이 생긴다.

 

[연담리(蓮潭里)]

 

연화(蓮花)마을

 

옛날부터 미호천변에 위치하였으며 마을앞에 반급류(半急流)인 여울이 있기에 반여울이라 하였다. 반탄(半灘)의 형국이 연꽃과 같다하여 리명을 연담리(連潭里)라 하고 동명을 연탄(蓮灘) 또는 연화(蓮花)라고 하였다 한다.

 

양화(陽花)마을

 

옛날 청주 양화절에 다니는 독실한 불교신자가 이 곳에 살았다 날마다 양화절, 양화절 하며 절에만 다녔다. 그 후 신자만 봐도 양화절이라 하여 동네 이름까지도 양화절이 되고 말았다 한다.

 

[용산리(龍山里)]

 

용대(龍垈)마을

 

거금(距今) 약 500년 전 장씨(張氏)가 내거(來居)한 마을로 터가 용(龍)의 형국이라 하여 용터 즉 용대(龍垈)라 하였다고 한다.

 

거령(巨靈)마을

 

마을형성 당시 신령님(神靈)의 지시로 이루어 졌다고 하여 거령(巨靈)이라 하였다 한다.

 

금성(金城)마을

 

거금(距今) 300여 년 전 최씨가 거주한 마을으로 두타산(頭陀山) 기슭에 위치하여 마을이 금수강산(錦繡江山)에 둘러싸인 모습이라 하여 금성(錦城)이라 하였다. 그 후 이자동음(異字同音)에 의하여 금성(金城)으로 전해오고 있다.

 

[용기리(龍基里)]

 

수의(守義)마을

 

수의마을을 수꼴이라 한다. 수꼴은 지킬 수(守)자를 써서 수꼴이라 했다. 수의동이란 지킬 수(守)자와 옳을 의(義)자를 써서 수의가 되었는데, 즉 옳은 의를 지켰다고 하여 수의동이 된것이다. 금성대군의 사우(祠宇)가 이곳에 있으며 금성대군 (金城大君)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왕자로 태어났다. 둘째형 수양(首陽)이 장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7대왕 세조가 되었다. 사육신(死六臣)들이 다시 단종을 왕위로 복귀할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이때 단종이 전에 금성대군의 집에서 같이 살았었다 하여 금성대군도 순흥(順興)으로 귀양을 보냈다. 금성대군이 이 곳에서 영남일대의 충의인사들에게 격문(激文)을 돌리어 발병(發兵)하려다 밀고를 당하여 사약을 받게 되었다. 그후 21대 영조(英祖)임금께서 금성대군을 모시는 서원(書院)과 사우(祠宇)를 짓도록 하였다. 그 후 서원은 철폐되고 사우만이 남아 있다. 이에 연유하여 수의동(守義洞)이 된 것이다.

 

구암(九岩)마을

 

약 350년 전에 경주 이씨가 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더니 동명을 방죽골이라 칭하였다. 방죽골이라 함은 마을 뒤에 소류지(沼溜池)가 있어서 방죽골이라 하였다 한다. 그 후 약 100여 년 후에 물난리를 겪고 약간 높은 곳으로 이주하였다. 뒷산에 암석(岩石)이 많아 이름을 구암(九岩) 이라 하고 오늘에 이른다. 약 50여 호 가구에 주산물은 누에고치와 담배가 많이 생산된다.

 

용전(龍田)마을

 

약 300여 년 전 광산 김씨 일가가 정착(定着)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이 마을은 앞에 광할한 평야지로 토지가 비옥(肥沃)하여 누구나 이곳에서 살면 일찍 부자가 되고 자손이 융성하게 될것이라는 풍수지리학설(風水地理學設)에 의하면 풍년이 일찍 온다 하여 동명을 이를 조(早)자와 풍년 풍(豊)자를 써서 조풍이라 하여오더니 약 80년 전에 용(龍)의 터전이라 하여 용전(龍田)이라고 명명(命名)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초평면 용전마을 입구

 

 

[화산리(畵山里)]

 

사산(斜山)마을

 

옛날에는 빗길이라고 불렀던 마을이다.빗길을 걸어야 하는 마을이기 빗길 사(斜)자와 뫼산(山)자를 써서 사산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의 역사는 400여 년 되며 약 40여 호에 전의 이씨와 고령 신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오경(五更)마을

 

옛날 화산리는 3개 부락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일제강점기 말엽에 청미 수리조합이 생긴 후 큰 마을은 침수되고 말았다. 현재는 높은 산에 올라가 옛날의 모습을 찾으니 5개소가 남았다 하여 오경(五更)이라고 개칭하였다고 한다.

 

죽정(竹亭)마을

 

죽정내는 현 초평저수지 여관 근방의 마을을 말한다. 이 마을이 죽정내라는 이름이 붙게된 연유는 고려 말기(1343년 고려 충혜왕 복위 4)에서 조선 초기(1413년 태종13)의 문신(文臣)인 최유경(崔有慶)이 그의 호가 죽정(竹亭)인데서 연유된다. 최유경은 판도좌랑(版圖佐郞), 사헌장령(司憲掌令), 전법총랑(典法總郞), 양광도 안렴사(楊廣道 按廉使), 찰방(察訪),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고, 태조(太祖) 5년 8월에는 도성(都城)을 쌓고 성문을 만들때 사대문(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자하문) 건축의 총 책임자인 성문제조(城門提調)가 되어 사대문(四大門)을 세우는데 총 지휘를 하였다. 1397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경기 충청도체찰사(京畿 忠淸道體察使)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도어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보직되었다가 사직하고 초평면 죽정내로 내려와 대나무로 정자를 짓고 그 이름 죽정(竹亭)이라 자기 호와 같이 하였다. 이로 연유하여 동명이 죽정내가 되었다.

 

 

 

[중석리(中石里)]

 

중리(中里)마을

 

중말(中-)/중리(中里)

 

‘장승배기’와‘ 앞말’을 아우르는 마을로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도로변에 있는 마을은 ‘장승배기’, 앞쪽에 있는 마을은 ‘앞말’이다.

 

석탄(石灘)마을

 

석탄마을을 돌여울이라 한다. 약300여 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미호천변에 큰 소(沼)가 있고, 여울이 져서 경치가 아름다워 옛날 원님께서 매년 나와 놀이를 하였다는 유래가 있으며, 냇가가 여울져서 아름다움으로 돌여울이라 부르고 돌 석(石) 자와 여울 탄(灘) 자를 써서 석탄이라 한다.

중석리 석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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