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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의 삶이 미래를 창조한다

@지식창고 202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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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적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 끌어당김과 종말론적 시간관의 통합

끌어당김의 법칙을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중의 하나가 시각화입니다. 시각화는 그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미래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함께 병행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은 '미래적 현재'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끌어당김의 법칙과 기독교의 종말론적 시간 개념을 병합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현존적 삶' 또는 '미래적 현재'의 삶이 무엇인지를 학문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다소 어려울 수 있으나 천천히 읽어 보시면 상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시간을 초월하는 의미를 갈망합니다. 끌어당김의 법칙과 기독교의 종말론은 서로 다른 언어와 전통에서 출발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핵심에서 깊은 공통점을 공유합니다. 이 두 관점을 통합하면, 우리는 미래를 미리 살아냄으로써 그것을 창조하는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단지 이상론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를 전환시키는 신학적·심리적 실천입니다.

 

끌어당김의 핵심: 감정으로 미래를 앞당기기

끌어당김의 법칙은 마음의 진동(감정 상태)이 우주의 에너지와 공명하여 비슷한 파동을 현실로 끌어온다고 설명합니다. 이 원리는 단순히 생각을 반복하거나 긍정적인 문장을 외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끌어당김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 이미 내가 원하는 미래를 살고 있다는 감정 상태'를 진짜처럼 느끼고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철저한 심리적 몰입과 신경계의 재훈련을 동반하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건강한 삶을 원한다면, 끌어당김의 법칙은 단지 건강을 바라는 것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건강한 사람처럼 식사하고, 운동하며, 감사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뇌의 회로를 새롭게 구성하고, 실제로 행동을 바꾸며, 나아가 환경과 사람과 기회를 바꾸는 파장을 만들어냅니다. 뇌과학적으로도 이러한 반복된 감정과 행동은 '뉴런의 재연결'을 유도하여 새로운 패턴을 생성합니다.

 

부유함을 꿈꾸는 사람은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그 풍요로움을 느끼는 감정에 집중하고, 감사하며 사는 연습을 통해 '마음의 기반'을 형성해야 합니다. 끌어당김은 마음의 파동이 외부 현실을 만든다는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바꾸어 구체적인 행동과 선택을 이끌어내는 변화의 시작점입니다. 그 중심에는 '감정'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미래를 상상할 때, 그것을 진짜처럼 느끼는 감정의 깊이가 바로 현실 창조의 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그 감정의 기반이 외부 현실이 아니라면, 그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내적 근거는 무엇이 될까요? 지금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바로 기독교 종말론적 신앙의 존재론적 기초가 끌어당김의 심리적 원리를 보완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그 감정의 근거가 무엇인가? 현실과 다른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여기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이 가진 존재론적 기반이 보완을 제공합니다.

 

기독교 종말론: 미래가 현재에 침투하는 시간 구조

성경에서 시간은 단순히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 즉 ‘카이로스’는 인간의 시간 속으로 개입하여,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구속과 완성을 이미 현재 안에 도래하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 정점입니다. 그는 장차 도래할 심판과 구원의 실체를 앞당겨 지금 이 순간 속에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예고가 아니라 시간의 패러다임 전환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 나라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은 단순히 '종말이 온다'는 예언적 구조가 아닙니다. 그것은 미래가 현재에 뚫고 들어와, 인간의 존재방식 자체를 바꾸는 시간적 질서의 전복입니다. 우리는 그 종말의 세계,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아직 이 땅에 있지만 이미 그 나라의 원리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것이 아니요, 위에 것을 생각하라”(골 3:1-2).

 

이 신학적 긴장은 신앙의 삶에서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긴장은 신앙인의 삶을 고통스럽게도 하지만, 동시에 의미 있게 만듭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부터 살아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종말론적 삶의 핵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실상'(ὑπόστασις, 히포스타시스)은 단지 주관적 확신이 아니라, 미래의 실재를 지금 안에서 실체로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 위에 실재하는 세계를 지금 내 삶 속에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방식입니다.

 

신자는 믿음을 통해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현재의 말과 행동, 삶의 방식 속에서 구현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병들고, 좌절하고, 불완전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루실 완전한 나라를 지금 미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은 단지 윤리적 결단이 아니라, 존재의 전환이며 시간 인식의 전복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지금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적 신앙이란, 단지 마지막 날에 구원받기를 기대하며 현재를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이 지금 이루어졌다고 믿고 그 삶을 앞당겨 사는 실천적 신앙입니다. 이것은 끌어당김의 법칙이 말하는 '미래 감정의 현재화'와 구조적으로 유사하지만, 그 근거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 약속을 지금 실상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현재는 더 이상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로부터 침투된 새로운 현재가 됩니다.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창조한다

현대의 여러 사유 체계—종교, 심리학, 물리학, 신비주의—는 하나의 통찰에 다다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상태가 미래를 결정짓는 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통찰은 단지 신앙적 명제에 그치지 않고, 의식의 구조와 시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합니다.

 

불교에서는 '찰나생찰나멸(刹那生刹那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개념은 모든 존재가 매순간 생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 흐름이 아니라, 오직 '지금'만이 실제라는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의 마음, 현재의 선택, 현재의 반응이 곧 업(業)을 만들고, 그 업이 또 다른 찰나의 현실을 이끕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마음이 만들어 내는 흐름 위에 잠재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떤 마음을 품느냐는 것이 곧 미래를 결정하는 핵심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발견됩니다. 파동함수는 모든 가능성의 중첩 상태로 존재하다가, '관측'이라는 행위가 들어오는 순간 하나의 현실로 수렴합니다. 여기서 '관측'은 단순한 시각적 행위가 아니라, 의식의 초점화입니다. 즉, 내가 어떤 가능성에 집중하느냐가 그 가능성의 현실화를 유도하는 조건이 됩니다. 이것은 물리학적 버전의 끌어당김의 법칙이며, '지금 무엇을 의식하느냐'가 '무엇이 현실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원리입니다.

 

이와 같은 불교적 통찰과 양자물리학적 설명은, 기독교의 종말론적 시간 이해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성경은 미래가 단지 시간의 끝에 놓인 사건이 아니라, 이미 지금 우리 안에 침투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그 실재의 결정적 표현이었고, 그 이후 믿음이란 곧 그 나라의 현실을 지금 살아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은 끌어당김의 논리와 놀랍도록 평행합니다. 바라는 것이란 아직 보이지 않지만, 그 믿음을 통해 이미 실상으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관점은 한 방향을 향합니다. 미래란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의식과 믿음과 선택을 통해 창조될 수 있는 실재의 가능성입니다. 내 안에서 감정, 사고, 믿음이 정렬될 때, 그것은 단지 내면의 변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현실의 조건을 바꾸는 창조적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이 '지금'을 얼마나 깨어 있고,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그 '미래'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선택이 미래를 창조한다는 말은 철학적 선언이자 영적 통찰이며, 동시에 물리학적으로도 뒷받침되는 창조의 원리입니다. 현존(presence)은 단지 수동적 머무름이 아니라, 존재의 적극적인 창조적 참여입니다.

 

이 두 시각이 만나는 지점은 '현재성(presentness)'에 있습니다. 끌어당김은 감정의 진동을 현재에 일치시키고, 기독교는 믿음을 통해 미래의 실재를 지금의 삶으로 끌어옵니다. 전자는 심리적·파동적이며, 후자는 존재론적·언약적입니다. 그러나 둘 다 말합니다. 지금 당신이 누구인지를 어떻게 사느냐가 미래를 결정한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이것은 끌어당김의 공식과 유사하지만, 결정적 차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신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는 미래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 결과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래를 창조하는 현재적 신앙

미래란 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미래는 이미 완성된 실재이며, 우리가 지금 그것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가 그 실재에 참여하게 됩니다. 신앙은 단지 ‘희망’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금, 그 희망을 선택하고 살아내는 창조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미래를 향해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현재화하여 현실로 만드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끌어당김이 말하는 진동의 법칙을 넘어,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선 실재화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단지 내가 바라는 것을 끌어오려는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미리 기뻐하며 살아가는 영적 능동성입니다.

 

결론: 현존이 곧 창조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는가가 당신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이는 단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환입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선형적 구조로 보이지만, 우리가 삶을 경험하는 방식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과거는 기억으로, 미래는 상상으로 존재할 뿐이며,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현재입니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그 미래는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존이 곧 창조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기독교는 이 진리를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수용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고 결정함으로써 그 현실을 앞당깁니다. 이처럼 믿음은 단지 기대가 아니라 실재를 현재화하는 존재적 참여입니다.

 

불교는 이를 '지금 이 찰나의 마음이 모든 업을 만든다'는 통찰로 풀어냅니다. 마음이 모든 현실을 창조한다는 관점은 과거와 미래를 모두 놓아버리고, 지금의 정신상태에 완전히 깨어 있는 삶을 강조합니다. 양자역학도 동일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관측이 현실을 만든다는 개념은, 내가 어떤 관점으로 우주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지금’은 단지 시간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이 문 앞에 선 당신은 어떤 가능성을 선택하겠습니까? 상처와 두려움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약속된 미래를 향해 지금 이 순간을 의미 있게 채워갈 것인가? 그 결정은 단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 존재 전체에 대한 선언이 됩니다. 당신이 오늘 이 순간에 깨어 있고, 감사하며, 믿음으로 행동할 때, 당신은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사람이 됩니다.

 

결국 우리는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믿음으로 살아내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단지 종교적 태도가 아니라, 우주적 창조의 원리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미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미래는 당신이 지금 품은 감정, 지금 드린 기도, 지금 선택한 방향 안에 있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창조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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