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군 문백면 지명유래
진천군 문백면 지명유래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의 지명유래입니다. 문백면에 있는 지명과 마을의 유래를 찾아 정리한 것입니다. 이글은 진천군 홈페이지 지명유래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옥성리(玉城里)
옥산(玉山)마을
옥산마을을 오미라고 한다. 오미는 약 360여 년 전에 조선 중엽(中葉) 진주 이씨가 정착하였고 그 후 역촌이라 하여 이곳에서 오고가는 길손과 역부들이 점심 참을 대었고, 염소국에 점심을 잘 먹었다고 하여 점심 오(午) 자 양 미(未) 자를 써서 오미라 하였다. 그 후 행정구역 개편 시 마을 옆에 옥과 같은 산이 있다고 하여 옥산(玉山)이라 칭하였다 한다. 또 한 설(設)은 지형상으로 어미알이 누워있는 형국으로 오메라 하였던 것이 오미로 변하였다는 설도 있다. 오미란 순수한 우리말이며 평지보다 조금 얕고 수초(水草)가 나고 또 물이 늘 고여있는 곳을 말한다. 오미란 동명이나 지명은 전국에도 많이 있다.
바사리
바사리는 문백면 옛 소재지를 말한다. 원은 마살리(馬殺里)라 한다. 여기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말을 죽이어 마살리라 하였는데 그 후 바사리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또 한 설은 지형이 말의 바를 사리어 놓은 형국으로 바사리라고 하는 설도 있다. 따라서 오미마을은 오메말, 갈마지(渴馬池)마을은 목마른 망아지의 형국이라고 한다.
파재-두성(豆城)마을
두성마을을 파재(芭城)라고 한다. 성(城)안이 파초(芭焦)잎과 같이 생겨 파재라고 하였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토지 측량을 하고 팥 두(豆) 자를 써서 두성(豆城)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마땅히 파성(芭城)으로 부르는 것이 옳을 성싶다. 파재는 삼국시대에 구축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의 흔적이 있고 동네 안에 절샘과 절터가 있어 지금도 기왓조각이 나온다. 마을 10여 호에 문화류씨(文化柳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류희원(柳希源)선생의 효자 정문(旌門)이 있다. 동네 앞산을 차일봉(遮日峰)이라 하는데 양천산(350m) 내맥(來脈)이 뻗치어서 이루어진 산으로 그 모양이 차일(遮日)을 쳐 놓은 것 같이 생겨 차일봉이라 하는데 이런 예는 전국 도처에 많이 있다. 예(例)를 들면
함경남도 풍산군과 신흥군 사이에 있는 산. 높이 2,508m
함경남도 정평군과 평양남도 영원군 사이에 있는 산. 높이 1,742m
함경남도 북천군에 있는 산. 높이 1,663m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 높이 1,529m
이 마을은 한때 피난곳이라 이름이 났으나 6ㆍ25격전지로 유명하며 호되게 혼이 난 곳이기도 하다.
능골(陵洞)
능과 같은 큰 무덤이 있어 능골이라 전한다. 이 무덤은 누구의 무덤인지 아직 확인이 되고 있지 않다. 마을어귀에는 옛 절터가 있으며 축대가 소롯이 남아 있다.
말부리고개
문백면 소재지에서 진천으로 오는 첫고개를 말부리 고개라고 한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께서 말을 타고 이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게 되었다. 고개마루에 마침 바위가 두개 있었다. (지금도 있지만)우암이 타고 온 말을 가리키며 "이 바위는 네 부랄 같구나." 하였다. 그 후 말부랄고개가 말부리고개로 변하였다 하며 이 고개에서 산세를 관망하시고 송강(松江) 정철(鄭澈) 선생의 묘소를 잡았다 한다.
봉죽리(鳳竹里)
어은(漁隱)마을
어은마을을 은골이라 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송강 정철 선생의 묘지를 정할 때 이곳 지형을 보고 어은지형(漁隱之形)이라 하였다 한다. 즉 고기가 숨어 있는 형국이라 하여 고기어(漁)자 숨을은(隱)자를 써서 어은이라 한다. 환희산(歡喜山) 아래 어은동이 있고, 송강(松江) 정철(鄭澈) 선생의 산소와 사당(祠堂)과 신도비(神道碑)와 시비(詩碑)가 있으며, 전시관에는 유품(遺品)으로 은배, 옥배, 친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송강 선생은 영의정(領議政),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시문청공(諡文淸公…글을 좋아하고, 맑고 깨끗한 선비)으로서 선조조 당시에 정치 문학 방면에 활약하였으며, 정치방면에는 당쟁의 소란한 와중(渦中)에서 많은 파란을 겪었지만은 문학방면에는 가사문학의 대성으로서 우리 나라의 시신(詩神)으로 추앙을 받고 있을뿐 아니라 시성(詩聖)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가 남긴 가사에는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 성산별곡(星山別曲), 장진주사, 시조 70여 수, 유고(遺稿…죽은 뒤에 끼친 원고)로 송강가사가 있으며, 우리 국문학사상 찬연(燦然)히 불후(不朽)의 빛을 남기고 있다. 가사 내용을 훑어보면 선생은 항상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부모에 대한 효행을 기록하고 있으며, 지금 우리 사회에 양심마저 퇴색되고, 변질되어가는 이 마당에 우리의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송강사우를 찾는 인사들이 늘 꼬리를 물고 있다. 은골마을은 송강사우의 성역화(聖域化) 사업(1979년)에 따라 근 20여 호 가구가 동구 밖에 새 터전을 마련하고 문화주택을 건설하여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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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鳳岩)마을
봉암마을은 서기 1683년에 이 동네에서 출생한 채 지홍(蔡之洪) 선생이 봉암(鳳岩)이라 자호하고, 거실을 봉암정사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여 8세에 이미 한시를 지어 세인을 놀라게 하였고, 성리학(性理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한때 충청도 도사(都事)도 지냈으며 저서로 성리관규(性理管規), 세심요결(洗心要訣), 독서진보 등과 많은 한시를 남기었고, 후배 교육에 힘써왔다. 어은팔경시(魚隱八景詩)도 그의 작품이다. 그가 죽은 후 지방 유림들이 그를 모시는 사우(祠宇)를 세우고 봉암향현사(鳳岩鄕賢祠)라 칭하였으며, 후배 교육의 도장으로 삼았다. 봉암동네 옆에 문백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근 70여 호 가구에 마씨(馬氏), 김씨, 조씨(曺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계산리(溪山里)
산직(山直)마을
산직마을을 산직말이라 한다. 삼국시대에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 산세가 험준하여 많은 도적떼들이 웅거하였던 곳이다. 당시 산적(山賊)들이 있던 곳이라 하여 산지갈이라 하였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7년(서기595년)에 신라 김서현(金舒玄) 공이 당시 만뢰군인 우리 진천의 태수(太守)로 내임(來任)하면서 이곳을 군사의 요충지로 잡아 성을 쌓고 군사를 집결시키자 산적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였다. 그 때 국사를 논하던 국사봉이 있었고, 장군이 왕자를 모시고 계시던 곳을 왕자봉이라 했다. 마을이 바르고 고을이 깊으며 산세가 곧으나 한 선비가 마을 이름을 산정동(山貞洞)이라 하더니 그 후 조선 말엽에 한 선비가 들어와 터를 잡고 양반 행세를 하여왔다. 그러나 근동에서는 아무도 양반으로 인정을 안하고 산직이라 하였다. 그 후 산정마을이 산직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리(新里)마을
신리마을을 세거리라 한다. 이곳은 청원군(淸原郡)과 진천군 충남의 천원군(天原郡) 3개군이 접해서 마을이름을 세군이라 부르다가 3개군을 통하는 도로가 신설됨으로써 큰 거리가 셋이 합치는 곳이라 하여 세거리라 부른다. 근 50여 호에 오씨(吳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도하리(道下里)
옛날 청주에서 한양(서울) 가는 큰 길 아래 있다 하여 도하리라 부른다고 한다.
도장(道長) 마을
옛날 괴한들이 부녀자를 납치하여 갈 때에 이 곳을 지났다. 하룻밤은 부녀자들이 소리를 지르니 오장관(吳長官)이 마침 이 곳을 지나다가 부하에 명령하여 괴한들을 잡았기에 도둑골이라 하였다. 그 후 도장배(盜將輩)라고 동명을 불러오다가 현재는 도장(道長)이라 한다. 황건너마을을 위황건너 아래황건너로 나눈다. 본 마을을 가려면 성암천을 건너야 하므로 황건너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아래황건너를 하대음(下大陰)마을이라 한다. 옛날 음씨(陰氏)가 거주했던 곳으로 하대음이라 동명을 붙였다 한다. 위황건너마을을 상대음(上大陰)마을이라 한다. 옛날에는 양지말이라고 불러오다가 다시 위황건너라고 하다가 해방 후 상대음이라 개칭하였다.
은탄리(銀灘里)
은성(銀城)마을
은재라 한다. 동리 입구에 은구덩이가 있어 은재라 하였다 한다. 이 동네는 문백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하며 성안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아늑한 곳이다. 동네 앞 개울 건너에 문백 초등학교 분교인 은탄 분교가 있다. 약 500여년전 장시가 제일 먼저 거주하던 곳으로 그 후 윤씨 김씨가 군락을 이루어 살게 되었으며 마을 앞산을 은화봉이라 한다. 약 1,0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가 있었으며 그 나무를 매년 위하였고 나무를 해치면 큰 화를 입었다 한다. 이로 인하여 은재라는 동명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갈탄(葛灘)마을
갈탄마을을 갈궁저리라 한다. 마을 앞 서편에 깎아 질린 벼랑밑에 수십 길 되는 웅덩이가 있어 남쪽 웅덩이에는 암놈, 북쪽 웅덩이에는 수놈의 이미기(이무기, 이심이,... 용이 되려다 못되고 물속에 산다는 여러 해 묵은 큰 구렁이)가 살고 있는데 서로 만나기가 소원인데 만나지 못하고 큰 장마나 져서 물이 많으면 만나려고 하나 그 때는 벼랑위에 이미기의 상극(相剋)인 서광(瑞光)이 비쳐오므로 하는 수 없이 수백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고 새끼도 낳지도 못하여 항상 두마리가 살고 있다고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해 질 무렵이면 지나가는 행인이 간곳이 없고 옷갓만 물위에 떠 있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으며 물가에 매어놓은 소가 간곳없이 없어지곤 하여 이는 이미기의 장난으로 생각하고, 한 농민이 칡덩쿨로 소의 머리를 감아매고 물가에 매어 두었다. 그 후 소의 몸뚱이는 간곳이 없고 쇠머리만 칡덩쿨에 달려 있었다 하여 이 여울을 우두(牛頭) 머리라 하더니 어느덧 소두머리가 되었고, 마을은 칡 갈(葛) 자와 여울 탄(灘) 자를 써서 갈탄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룡골마을
문백 은탄 분교에서 동쪽에 있는 동리가 도룡골이다. 태봉산(胎封山)의 형국이 용이 강을 건너려는 형국이기에 도룡(渡龍)골이라 한다. 또 한 설은 동룡(東龍)이 있는 곳이라 하여 동룡골이라 하더니 도룡골로 변하였다는 설도 있다. 태봉산은 조선 말기 왕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이라 한다. 근년에 태봉산에 묘를 쓰는데 장정 10여 명이 들어야 하는 돌 뚜껑이 나와서 그 돌을 들어냈더니 그 밑에는 돌방아확과 같이 되었다. 한편 그 안에 "조선 삼월" 이란 글자가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지워져 형태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태봉산을 만들기 위하여 민비(閔妃)의 권세로 이 근방 사람을 동원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여름 한철 경향 각지에서 피서차 수많은 탑승객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수가 차차 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낚시 애호가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평산리(平山里)
평사(平沙)마을
본 마을이 형성되기는 고려 말기로 추정된다 하며 고려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대제학(大提學) 벼슬을 한 문순공(文順公) 민적의 후예(後裔)가 이곳 평사에 내주(來住)한 이래 인조(仁祖) 20년(1642년) 사마(司馬) 벼슬에 합격한 민태중(閔泰重)이 관로(官路)에 나가지 아니하고 고향인 평사강상(平沙江上)에 낙진당(樂眞堂)과 영백정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배 교육에 힘쓰면서 평생을 지내왔는데 송 우암(宋尤庵) 시열(時烈) 공에게 수학(受學)하였다 한다. 선생은 이곳에 자주 놀러 오시었다 하며 그 때 우암선생이 동명을 평사로 지어주었다 한다. 평사는 천혜경관(天惠景觀)이 아름다운 진천의 유일한 명소(名所)이기도 하다. 동으로 두타산의 내맥(來脈)이 뻗치어 남북으로 감싸고 서쪽에 양천산이 대치(對峙)하여 남북으로 협곡(峽谷)을 이루었으며, 진천 관내 대부분의 하천과 음성군의 일부의 하천이 이곳에 모이고 모여 굽이굽이 수만 년을 흘러 돌을 깎고 바위를 부수며 천혜경관(天惠景觀)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은빛 찬란한 백사장(白沙場)이 구석구석 벌판을 이루어 10여 km에 달하며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병풍을 두른 듯 곳곳마다 숱한 전설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기에 옛날 풍류객(風流客)들이 이곳을 즐겨 찾았으며 시 한 수씩을 남기었으니 평사팔경(平沙八景), 통산별업팔경(通山別業八景) 등 이 지방의 명승지를 읊었다.
만암폭포(蔓岩瀑布)
양천산을 중심으로 하여 각각 골짜기마다 흐르는 99곡수(谷水)가 동쪽으로 흘러서 폭포가 되었다. 병자가 이 폭포수에서 목욕하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약수탕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었다.
기자암(祈子岩)
만안폭포 밑에 있는 바위 이름이다. 누구든지 여기 와서 조그마한 돌 3개를 던저서 떨어지지 않으면, 곧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그러기에 사면팔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연자봉(燕子峰)
양천산 여맥(余脈)이 동쪽으로 이루어진 봉명(峰名)이다.
봉서대
평사 상류 북쪽에 바위가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봉황새가 날개를 펴면서 날아갈 듯한 형상이라 하여 봉서암이라 하였다. 이 곳을 흐르고 있는 미호천(美湖川)은 산세와 수세가 굴곡과 기복이 심하여 꾸불꾸불한 물줄기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과 같다.
오동탄(梧桐灘)
평사마을 입구에 세 골짝물이 합수되는 곳에 있다. 명사강상(明沙江上)에 백구 백로가 오락가락하니 강호(江湖)를 즐기는 사람들의 흥을 돋우어 준다. 옛날에 이곳에 정자가 있었고, 오동나무가 수십 주 있었기에 오동탄(梧桐灘)이라 한다.
장암창벽(丈岩蒼壁)
장암창벽은 봉서암과 강을 같이 따라 대치하고 있다.
별학암(別鶴岩)(벼락바위)
바위 아래에 난석(亂石)이 흩어져 있는 모습은 호랑이나 표범같기도 하고, 자라나 거북이 같기도 하다. 그 중에 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몇 만 년을 지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많은 비바람에 씻기었으리라. 민태중공과 송 우암 선생이 항상 만나면 이 곳에서 작별인사를 나누던 곳이라 한다.
취적대(吹笛坮)
별학암 남쪽에 있으며 깎인 듯한 암벽으로서 티끌하나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 대(坮)가 구름속에 우뚝 솟은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답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선인(仙人)들이 이 곳에 모여 피리를 불면서 마음껏 즐기며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선인들이 피리를 불었기에 취적대(吹笛坮)라고 한다는 것이다.
평사우담(平沙牛潭)
갈탄마을과 전설편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동룡대(東龍坮) 서룡대(西龍坮)
소두머니 동서로 대치하고 있는 암벽을 말한다. 옛날부터 경치 좋은 곳을 찾는 인사(人士)들이 유람차 이 고장을 찾기도 했고, 또 이 고장에 집을 마련하여 살기도 하였다. 지금도 학교나 교회 또는 사회 단체에서 여름이면 이 곳을 찾아 합숙 훈련을 하는 등 여름 한철을 마음껏 즐기는 곳이다. 여기 평사팔경(平沙八景)이 전래(傳來)되었기에 소개하여 본다.
- 갈탄어화(葛灘漁火) : 갈궁저리 소두머니에서 밤고기 잡는 불빛이 일품이요
- 장암제우(丈岩霽雨) : 장암 창벽에 비 갠 모습이 일품이고
- 취적초가(吹笛樵歌) : 취적대에서 나무하는 목동들의 노래소리가 일품이다.
- 두타산월(頭陀山月) : 두탄산에 달이 걸려 있는 것이 일색이며
- 별학귀운(別鶴歸雲) : 별학바위에 구름이 맴도는 모습이 또한 일품이다.
- 오동제위(梧桐啼僞) : 오동탄의 물소리는 거짓 울음소리
- 평사낙안(平沙落안) : 평사 벌판에 기러기가 내려앉은 것이 일품이며,
- 잠두합천(蠶頭合川) : 누에머리(지명)에서 내가 합치는 것이 일품이더라
또한 평사 밤이 유명하며 옛날 조정에 진상하던 밤이라 한다. 지금도 강둑에 밤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평사는 교통이 불편한 것이 험하지만, 앞으로 개발의 여지가 많으며 관광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라 하겠다. 평사는 20여 호 가구에 민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통산(通山)마을
통산마을을 성주머니라 한다. 성주머니는 성(城)을 쌓아놓은 양 비교적 같은 높이의 산으로 삥돌려 산으로 둘려 싸이고 동쪽 일부분이 틔어 있어 성문(城門)을 연상(聯想)케 한다. 따라서, 지형이 성지문(城址門)과 같아서 동명(洞名)도 성지문이라 하더니 어느덧 성주머니로 변하였다. 통산(通山)이라 함은 마을 동쪽 앞산이 통뫼로 되어 있어 이로 인하여 통산(通山)이라 불리어 온다. 마을이 형성되기는 고려 말기로 추정된다 하여 처음에는 권씨 일가가 정착한 곳으로 권성지문이라 일컬어 오더니 그 후 상산 임씨(常山林氏)들이 대성을 이루고 세거(世居)하고 있다. 이제 시내버스가 이곳까지 운행되고 있으며 50여 호에 250여 명의 주민이 문화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죽전(竹田)마을
죽전마을을 대밭골이라 한다. 서남쪽으로 양천산(養千山, 楊泉山, 梁川山)을 등지고 성지문(城址門) 안에 자리잡은 대밭골은 옛날 대나무가 무성했던 밭이라 하여 대밭골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으며, 그 이름 죽사(竹寺)라 하였다 한다.
안능(安陵)마을
안능마을을 배티(梨峙)라고 한다. 옛날 이곳에 배나무가 많아서 배티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윗마을을 윗배티(또는 안능)라 하고, 아랫마을을 아랫배티(또는 덕하(德下))라고 한다. 안능(安陵)이란 세종조(世宗朝)에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의 묘소가 이곳에 있으며, 그의 8대손 약천 남구만(藥泉 南九萬)이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로 연유하여 안능이란 동명이 생기게 되었다 한다. 남구만은 숙종조(肅宗朝)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고, 저 유명한 「동창(東窓) 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들아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의 시조를 남기었으며 그가 진천읍 신정리 소강정 마을 앞 강가에 소강정(小江亭)을 짓고, 풍월(風月)을 노래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세전(世傳)에 의하면 남지(南智)의 묘소는 중국의 감여가(堪輿家…풍수에 관한 학문을 공부한 사람) 두사충(杜師忠)이란 사람이 이 지형을 가리켜 병풍에 옥대(玉帶…옥으로 만든 품대(品帶) 띠)를 걸어놓은 형국이라 칭찬하였다. 그 후 감여가들은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이라 하여 용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형국이라 하며 극찬하였는가 하면 어떤 짓궂은 감여가는 고사괘지형(枯蛇掛枝形)이라 하여 마른나무에 뱀을 걸어놓은 형국이라고 꼬집은 사람도 있다. 어찌하였든 남지(南智)의 묘지가 명소(名所)라고 전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 그의 후손 의녕 남씨(宜寧南氏)들이 안능마을(윗배티)에 대성을 이루며 세거(世居)하고 있으며 덕하마을(아랫배티)에는 상산 임씨(常山林氏)들이 대성을 이루고 있다. 양마을 30여 호에 고추 담배가 많이 난다. 안능마을과 대밭골 사이 언덕에 절터가 있으며, 전에는 석불과 탑이 있었다 한다. 하루는 성주머니 글방에 다니는 학동(學童)들이 글공부가 하기 싫어 절터 근처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한 학동이 윗저고리를 벗어 돌부처 머리에다 걸어놓고 낫으로 돌부처 목을 찍었다. 그랬더니 별안간 회오리바람이 일어 윗저고리는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다. 그 후 학동은 집에 돌아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출처 카카오맵 로드뷰 안능마을]
구곡리(九谷里)
내구(內九)마을
구곡리를 굴티라 하고 내구마을을 안굴터라 한다. 굴티는 연자봉(燕子峰)을 배경으로 하여 좌우굴곡이 된 곳에 동리를 이루고 그 앞에 하천이 횡류(橫流)하고 있다. 이 곳은 굴곡이 심하여 굴치(屈峙)라고 하며 오늘의 굴티가 이에 연유된 것이라 한다. 동구(洞口) 앞에 거북바위가 있는데 이 거북이가 동리를 지킨다고 하며 구산동이라 음각(陰刻)한 자연 석비가 동구 앞에 서있다. 임연 장군(林衍 將軍)이 새긴 것이라 전한다. 진천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는 상산 임씨(常山林氏) 를 손꼽는다. 시조인 임희(林曦)가 신라 말기의 인물로 진천 구곡에 거주하여 관향(貫鄕)을 상산(常山)으로 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1300여 년을 그 자손들이 옛터(굴티)를 중심으로 살고 있어 이 고장 최고(最古)의 성씨가 되는 것이다. 상산 임씨의 시조 임희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흥화부원군(興化府院君)이 되고 벼슬은 문하시중평장사(수상)에 올라 상산백(常山伯)이 되고 충숙공(忠肅公)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임연(林衍)은 고려중기에 위사벽상공신(衛社壁上功臣)이 되어 실권을 쥐게 되고 고향인 진천(당시 진주현)을 창의현(彰義懸)으로 다시 의녕군(義寧郡)으로 승격한 바 있으며 그의 후손 임수전(林秀筌)은 선조조 이진왜란 때 의병을 영솔(領率)하고 죽산 봉성에서 왜적을 토벌하다 순절하고 그 아들 현(賢)은 광해조 11년에 명(明)을 도와 청병(淸兵)을 치다가 전사하였으므로 부자 충신의 정려(旌閭)가 동네 앞에 서 있다. 또한 임연 장군 숭모비(崇慕碑)가 후손들에 의하여 동구 밖에 서 있으며 장군의 세력이 고려 천지를 호령할 때에 구축하였다는 농다리는 거대한 자연석으로 축적한 것인데 길이가 약 100m, 넓이가 약 1.5m, 높이가 약 1.5m 그 당시의 규모로는 큰 것이다. 기술 상으로도 홍수 시에는 다리 위로 물이 넘어가게 하였으므로 폭류(暴流)의 압력에도 지탱할 수 있게 놓여져 있으므로 근 800여 년이 경과하는 동안 매년 같이 홍수가 나면 폭류가 그 다리를 넘어가되 오늘에 이르기까지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어 온 것이다. 자연석으로 축적구조(築績構造)한 것이라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가는 돌이 있으므로 농(籠)다리라는 명칭이 붙게된 것이며 진천의 역사적 명물로 전하여 내려오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규모가 큰 것이라 한다. 또한 구곡리의 명물로 소습천이란 곳이 있다. 이 샘은 농다리 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있으며, 산비탈에 반석(盤石)이 품자형(品字形)을 이루고 있고, 반석 사이에서 용출(湧出)되는 이 샘물은 연중 마르는 법이 없다. 이 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으며, 또한 풍습에도 좋고, 안질(眼疾)에도 양약(良藥)으로 이름이 나서 여름 한철에 피서객들이 이 샘가에 줄을 잇는다. 소습천을 어수천(御水泉)이라고도 한다. 세종대왕께서 안질 치료 차 청주 초정에 가시는 도중 이곳을 통과하실 때 이 샘물을 마시었다 하여 어수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굴터는 100여 호가 되는 대동(大洞)으로 문상초등학교 전신인 구곡 간이 학교가 있던 곳이며 자연마을의 무리를 중리 새꼴 양지말, 평지말, 구억말로 나누어 부른다. 인구 460여 명에 근 70%가 상산 임씨들이라 한다.
외구(外九)마을
외구마을을 밖굴터라 한다. 1개 리에 정려(旌閭)가 셋씩이나 서 있는 곳은 오직 여기뿐이다. 일명 굴티를 효자촌이라고도 한다. 조선개국 원종공신(李朝開國原從功臣)으로 의정부 참판 평도공 죽정 최유경(議政府參判平度公竹亭崔有慶)이 만년(晩年)에 초평면 화산리 죽정내에 은퇴 한거(閑居)하여 죽정(竹亭)이라 자호한 이래 600여 년을 세거(世居)하고 있다. 최유경의 여섯째 아들 사흥(士興)이 문백면 구곡리 외구(밖굴터)로 이주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그 아버지 유경과 함께 효행으로 병정된 것이 동구 앞에 서 있다. 죽정공(竹亭公)이 부친상을 당하여 산소 부근에 묘막을 짓고 6년 간의 장구한 세월을 상심 속에서 살았으며, 그의 아들 최사흥도 역시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던 중 모친이 병석에 누워 중태에 이르니 자기 허벅다리의 살을 베어 봉양하였다 한다. 부자(父子)의 효행을 기리어 효자문을 건립한 것이다. 또한 동구 밖 안굴터로 가는 길가에 열녀문(烈女門)이 서 있으니 이는 상산 임씨 대철(당시 벼슬 가선대부 호조참판)의 부인 은진 송씨(宋氏)의 열행(烈行)을 기리는 열녀문으로서 남편이 별세하자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自決)함으로써 그 열행을 기리어 열녀문을 세우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외구마을은 근 50여 호에 전주 최씨와 상산 임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장월리(長月里)
어룡(魚龍)마을
어룡마을을 어링이라 한다. 어룡이가 어링이로 변하였을 것이다. 동리 뒷산 모습이 용(龍)의 모습이라 하여 고기 어(魚) 자 용 용(龍) 자를 써서 어룡이라 하였다 한다.
월호(月湖)마을
월호마을을 다람비라 한다. 달과 인연이 있는 듯하다. 현재는 구월호, 신월호로 나눈다. 구월호는 들 복판에 자리잡아 보름달의 모습이라 하여 월자(月字)를 붙이고 마을이 바다에 접근해 있는 형국이라 하여 호자(湖字)를 붙이었다 한다. 구월호는 수해로 폐동(廢洞)이 되고 말았다.
장두(長頭)마을
장두마을을 장머리라 한다. 마을의 형국이 노루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노루 장(獐) 자와 머리 두(頭) 자를 써서 장두라고 하였다. 그 후 산에 나무가 없어지면서 마을민들이 빈궁(貧窮)하게 되었다. 마을민들은 노루는 숲이 우거져야 잘 사는 법인데 숲이 없어서 빈촌이 되었으니 산에 나무도 가꾸고 앞으로 잘 살아 보자고 하여 장두(長頭)라 개칭하였다 한다.
사양리(思陽里)
사미(思美)마을
김내현 공은 본관(本貫)이 경주(慶州) 이며 문백면 장월리 월호촌(月湖村…다람비)에서 선조 34년(1601년)에 출생하였다. 그는 천성이 청렴고결(淸廉高潔)하고 지조(志操)가 굳어서 불의와 타협할 줄을 몰랐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한성좌윤(漢城左尹)까지 올랐으나 당파 싸움이 심할 때 벼슬을 사직하고 그때 나이 38세로 진천 고향에 돌아와 정자를 지어놓고 학문과 교육으로 여생을 보내며 날마다 정자에 나아가 북쪽 서울을 바라보며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왕실(王室)을 향하여 북향사배(北向四拜) 하니 이 정자를 망북정(望北亭)(망북정은 장월리 월호마을에 자리하고 있다.)이라 했다. 정송강(鄭松江)이 임금을 생각하고 지은 사미인곡(思美人曲)을 표방(標榜)하여 동명도 사미(思美)라 하였다 한다.
추동(楸洞)마을
추동마을을 가래골이라 한다. 옛날에 가래나무(楸木)가 많았던 곳으로 가래골이라 하고 추동(楸洞)이라 하였다.
※ 가래나무(楸木)
호두과의 큰키나무로 산골, 고원 강가에서 야생(野生)한다. 잎은 갓모양 겹잎이고 작은 잎이 9~15개 있으며 잎대와 잎면에 많은 털이 나있다. 암수 12루. 5월에 수꽃은 수술과 같이 늘어지고 암꽃은 줄기 끝에 4~9개씩 달린다. 열매는 핵과(核果)이며 가래라고 한다. 호두와 비슷하며 좀 갸름하고 내과피(內果皮)가 두껍고 거무튀튀한데 세쪽이나 네쪽으로 붙고 속의 살이 적고 맛이 떫어 식용에는 적당하지 못하여 약용으로 쓰인다. 재목은 추목(楸木)이라 하고 가벼워서 총이나 항공기 또는 옷장이나 조각재로서 사용한다. 강원도 평안남북도 만주등지에 분포한다. 열매를 추자(楸子)라 하고 옛말 : 래라 했다. 이 추자(가래)를 모아 도시에서 많이 팔면 주머니에 가래 두개을 넣고 다니며 손으로 비비어 특이한 가래 마찰음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맹동(孟洞)마을
맹동마을을 맹강골이라 한다. 맹강골은 맹장군의 묘소가 있어 그 후손 맹씨(孟氏)가 몇집 살고 있었다. 근동(近洞) 사람들은 이 골짜기 동네를 맹가(孟家)골이라 했다. 맹가골이 어느덧 맹강골이 되었으나, 현재는 집 한 채 없는 산비탈 계곡에 지나지 않는다.
호암(虎岩)마을
호암마을을 범바위라 한다. 뒷산에서 범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범바위라 한다. 또한 지형이 복호형(伏虎形)이라 하여 범이 바위에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해서 범바위라 하고 범 호( 虎) 자 바위 암(巖) 자 호암이라 한다. 음 정월 13일이면 그해 운에 닿은 연령과 생일을 가진 사람이 산신제를 지내어 마을의 재난과 인명을 보호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30여 호에 평택 임씨(林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중리(中里)마을
중리마을을 중말이라 한다. 거금 약 500년 전에 청주 이씨가 거주한 마을인데 중앙에 있다 하여 중리라 하고 중말이라 한다. 중리마을은 내구마을과 접하여 있다. 앞으로 미호강이 흐르고 바로 앞에 초평저수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중리 마을 앞에 농다리가 있으니 이곳에 꼭 들러야 한다.
소가(所加)마을
소가마을을 소가리라 한다. 이 곳의 지형이 우경지형(牛耕之形)이라 하여 소가 밭을 가는 형국이라 소가리라 한다.
양암(陽岩)마을
양암마을을 볕바위라 한다. 마을 앞에 바위가 있으므로 볕바위라 한다. 저수지가 생기어 마을이 분산되었다.
내동(內洞)마을
내동마을을 안골이라 한다. 동네 위치가 지역 안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안골이라 한다는 것이다.
문덕리(文德里)
미래(美來)마을
미래마을을 미력골이라 한다. 미력골은 두 마을으로 나누어졌는데 윗마을을 윗미역골, 아랫마을을 아랫미력골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곳(윗미력골)에 절과 미륵(彌勒)이 있어 미륵골이라 하였는데 미력골로 변하였다. 신라시대 경주 김씨가 내거하여 절을 짓고 불교를 믿으며 세거(世居)하여 왔다. 지금도 경주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동덕(東德)마을
동덕마을을 동덕이라 부른다. 동명의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불과 가구 수 5호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마을 전면에 저수지가 생기면 농토는 더욱 줄어들 것이라 하여 동세(洞勢)는 더욱 퇴세(退勢)되어 갈 것이다.
원암(院岩)마을
원암마을을 자라바위라 한다. 자라바위는 자라와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자라바위라 한다. 그래서 자라 원 자(黿)와 바위 암(巖) 자를 써서 원암이라 했던 것을 자라 원자를 으뜸 원자로 바꾸어 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진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박씨 내외가 살았는데 자식을 두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던 중 하루는 노승이 하는 말이 "용왕(龍王)을 위하면 귀동자를 낳을 것이다."라 하였다."바다가 없는 곳에서 어찌 용왕을 위할 수가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니 "자라는 수중 명물이라 자라와 같이 생긴 바위를 위하는 것도 가할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 후 냇가에 가서 자라와 같이 생긴 바위를 찾아서 5년 간이나 치성 기도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동네를 떠나려고 이삿짐을 싸놓고 날 새기를 기다리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꿈에 노승이 현몽 하기를 "잘못 찾아 기도하였으니 자라바위를 다시 찾아 보라" 하여 박씨 부부는 다시 자라바위를 찾아 치성껏 기도하였더니 그 후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분만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구대마을
구대마을을 구년터라고 한다.
문상(文相)마을
문상마을을 문생이라 하는데 문생이는 이미 폐허되어 마을이 송두리째 없어지고 말았다.
태락리
태락마을을 다랭이라 한다. 아마도 택락리가 다랭이로 변한 것 같다. 삼국시대에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역참제도를 실시하였을 때 이곳에 원(院)고 역이 있었으며, 그 규모는 역마가 14마리, 역리가 31명, 역노가 70명, 역비가 17명의 관원(官員)이 배치된 곳으로 비교적 큰 역에 속하였다 한다. 역에서는 주로 공문의 전달, 관물(官物)의 운송, 공무(公務)를 띤 출장, 관리(官吏)들의 왕래 숙박(宿泊) 등 편의를 도모하였다고 한다. 청주 방면에서 온 공문을 말을 바꾸어 타고 말방울 소리를 울리며 한티고개를 넘어 원동 앞을 지나 진천에 이르고, 진천에서는 장양역(지금의 이월)에 장양역에서는 광혜원으로 한양까지 이런 식으로 전달이 되었다고 한다. 다랭이마을에는 겨우 명맥(命脈)을 유지해가는 노목(老木)인 느티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당시 역사 앞에 있었다 하며 이 나무만은 많은 옛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실물학 박사인 일본 마도노 교수는 이 느티나무를 수령(樹齡) 700년에 충북에서 둘째가는 노목으로 평가한 바 있다.
역리마을
조선시대 한양으로 가는 대로(大路)로서 여기서 숙박을 하고 과객(過客)들이 말을 갈아탔기에 역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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