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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군 이월면 지명유래

@지식창고 발행일 :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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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군 이월면 지명유래입니다. 이글은 충분 진천군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대부분 수정하지 않고 이후 차료를 보충하면 수정될 수 있습니다. 

 

 

 

송림리(松林里)

 

시장마을

 

1590년경 신잡(申雜) 선생이 노곡(老谷)마을에 안착하여 마을이 형성될 무렵 진천과 청주 등지에서 이곳을 지나 안성과 한양에 이르는 동안 주로 이곳에서 쉬어가게 되어 자연 시장이 형성되고 더욱 1913년 이월면사무소가 옮겨옴으로 인하여 시장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는 1일과 6일로 5일 간격 장이 선다.

 

대막(大幕)마을

 

이월면 소재지에서 서울 쪽으로 다리를 건너서면 바로 여기가 대막거리다. 옛날에 한양(서울)의 과거객(科擧客)과 상인들이 오고가며 쉬어가던 곳이다. 당시 마씨(馬氏)가 술집을 차려놓고 장사를 하는데 그 술집이 큰막으로 지어져 큰 대(大) 자와 장막 막(幕) 자를 써서 대막이라 하고 그 거리를 대막거리라 칭하게 되었다.

 

송현(松峴)마을

 

옛날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이 일대를 송림(松林)이라 하였고 소나무 고을을 이루고 있는 이 동네를 소나무 송(松) 고개 현(峴) 자를 써서 송현이라 하였다

 

학동(鶴洞)마을

 

1700년경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며 윤씨(尹氏) 형제가 대구지방에서 이주한 곳인데 처음에는 윤촌(尹村) 또는 독금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 한 가지 설은 안성지방에서 독기 김씨(강능 김씨) 일파가 이곳에 와서 대성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중 한 분의 호를 따서 독지미라 칭하여 오다가 강능 김씨들이 안성으로 돌아간 후에 당시 마을 뒷산 소나무 숲에 학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므로 학동(鶴洞)으로 불러오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마을 뒷산 공동묘지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강능 김씨들의 묘가 30여 기가 있다 한다. 지금은 학동(鶴洞)이 학동(學洞)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학동마을입구

 

신계리(新溪里)

 

상신(上新)마을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60년이요 진천 사람으로 천주교(서학, 西學)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신계리 서상종(徐相鐘)이라 한다. 1890년대 천주교를 탄압하자 신도(信徒) 들은 산골을 찾아 은거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주로 경기도 안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차령산맥속인 이월면 신계리와 백곡면 양백리 성대리 등지에서 은거하며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마을이 형성되며 새로운 울이 생겼다고 하여 고개 마을은 고개 새울, 토기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점촌은 점새울, 아랫마을은 아래새울이란 순수한 우리말로 동명이 붙었다. 신계리(新溪里)는 전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곳의 지형이 닭벼슬 같이 생겼다 하여 믿을 신(信) 자와 닭 계(鷄) 자를 써서 신계리(信鷄里)라 하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신계리(新溪里)로 변하고 말았다 한다.

 

하신(下新)마을

 

동명의 유래는 상신마을과 같으며 다만 윗마을을 상신(上新), 아랫마을을 하신(下新)이라 한다. 이 아랫새울과 어당이 앞에 이월 저수지가 있어 낚시를 즐기는 태공들과 관광객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

 

장양리(長陽里)

 

일영(日永)마을

 

일영마을을 일영거리라 한다. 일영거리는 장양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어 온종일(終日) 햇빛을 받고 있으므로 날 일(日) 자와 길 영(永) 자를 써서 일영이라 하였다고 한다.

 

화양(花陽)마을

 

화양마을을 오양산이라 한다. 1670년경 평산 신씨들이 노은영당(老隱影堂)에 찾아오던 중 양지 동산(陽地洞山)에 벚꽃이 만발하여 꽃 속에서 쉬다가 꽃과 햇볕이 좋다 하여 화양(花陽)이라 칭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장양(元長楊)마을

 

원장양은 이월 초등학교 동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이 마을을 위시한 학교 뒤로 옛날 역참 제도를 실시하였을 때 장양역이 있던 곳이다. 장양역에는 역마 15필, 역리 28명, 역노 55명, 역비 20명이 배치되어 교동의 요충지대를 이루었었다.

 

노원리(老院里)

 

노곡(老谷)마을

 

노곡마을을 논실이라 한다. 1600년대 임진왜란이 격화되자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신잡 선생이 선조대왕과 함께 신의주까지 피난을 다녀와 보니 둘째 아우 업이 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로 피란 도중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물 속에 투신하고 말았다. 셋째 아우 입은 충주 탄금대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였고, 넷째 아우 규(硅)도 임진강에서 전사하였으며 둘째 아들 경지(景址 …당시 현감)도 충주 탄금대에서 숙부(淑父) 입과 함께 전사하였다. 68세의 노령으로 평생을 모셨던 선조대왕이 승하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청풍명월의 땅 진천군 이월면 무제봉하에 은퇴(隱退)하여 한거(閑居)하니 늙어 은퇴한 신잡 선생을 일컬어 동명을 노은(老隱)이라 하였다. 신잡 선생이 별세한 지 167년이 지난 영조 50년(서기 1774년)에 그 후손과 그 문인(門人)의 후예들이 사당을 짓고 영정 (影幀)모시니 이를 곧 노은영당이라 부른다. 또한 천연기념물 13호로 지정된 노도래지가 바로 영당 옆에 있다.

 

서원(書院)마을

 

서원마을을 서원말이라 한다. 신잡 선생이 이곳에 은퇴한 뒤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청년제자들을 모아 교육하기를 낙(樂)으로 삼았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항상 충효를 교육의 지표로 삼고,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이라는 뜻에서 그 서원의 명칭을 백원서원(百源書院)이라 하였다. 이 서원에는 이 지방 출신 선현(先賢)으로 학문과 효행이 탁월했던 이종학(李鐘學), 김덕숭(金德崇), 이여, 이부(李阜)를 배향(配享)하여 그 학행을 본받게 하였다. 이에 연유하여 서원말이 되었다. 지금은 서원은 없어지고 서원에 배향했던 선현의 묘만 남아 있다.

 

서원마을 입구

 

궁동(宮洞)마을

 

궁동마을을 궁골이라 한다. 중국 원(元)나라 홀필렬(忽必烈) 황제가 이곳에서 기씨(奇氏) 처녀에게 장가를 들고, 장인 장모를 위하여 큰

 

궁궐을 지었다. 이로 연유하여 궁골이 된 것이다. 지금도 동네 뒷밭 궁터에서는 수없이 기왓장이 산재해 있고 주춧돌이 아련히 남아 있으며 뜻있는 인사들이 이 곳을 찾아주고 당시의 감회를 되새기고 있다.

 

신당(新堂)마을

 

신당마을을 신댕이라 한다. 조선 선조 이후 광해군 시대에 서원마을에서 상산 임씨가 이거(移居)하여 마을이 커지며 신당(新堂)이라 칭하게 되었다. 바로 이 마을 큰 도롯가에 어수정(御水井)이 있다. 홀필열의 본궁(本宮) 기황후(奇皇后)가 이 우물을 사용하였다 하여 어수정이라 한다. 또 한 설은 세종대왕께서 안질 치료 차 청주 초정약수터에 가실 때 이곳 우물에서 세수를 하시었다 하여 어수정(御水井)이라고도 한다.

 

사곡리

 

반지(盤池)마을

 

1600년경에 교, 하, 노씨(交 河 盧氏) 세 가구가 내주(來住)하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소반과 같은 형상이며 그 가운데 좋은 못(우물)이 있어 물이 항시 흘러나오는 형국이어서 소반 반(盤) 자와 못 지(池) 자를 써서 반지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30여 호에 유씨(柳氏)와 노씨(盧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사지(沙池)마을 조선 중엽 1600년경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강능 김씨(江陵金氏)가 이 마을에 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지형이 사지앙천형(獅止仰天形) 즉 사자가 행동을 멈추고 하늘을 우럴어 보는 형국이라하여 사지(獅止 또는 獅池ㆍ獅地)가 되었다 한다. 또 한 설은 이 지방 근처가 무두 사질토(沙質土)로 모래가 많고 물이 잘 흘러나오므로 모래 사(沙) 자와 못 지(池) 자를 써서 사지라 한다. 사지 뒷산 중턱에 김유신 장군이 수도(修道)하였다는 장수굴이 있다. 산위에서 흘러내린 모래흙으로 많이 매몰되어 있는데 현재는 높이 2.7m, 넓이 7m의 굴 입구가 있을 뿐 내부는 알 길이 없다. 옆에 큰 바위벽에는 불상(佛象) 이 조각되어 높이 4m 정도가 노출되어 있고 밑부분은 토사에 묻히어 있다. 또한 사지마을 뒷산 50번지에 효자로 이름 높은 모암(慕庵) 김덕숭(金德崇) 선생의 정려(旌閭)가 있다. 30여 호에 한산 이씨와 강능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수평(水坪)마을

 

수평마을을 수평재라 한다. 수평재는 산 지형이 수평으로 되어 있어 이로 연유하여 수평재라 이름하게 되었다 한다.

 

이곡(梨谷)마을

 

이곡마을을 은행정(銀杏亭)이라 한다. 이 마을은 옛날 이곡면(梨谷面) 소재지로서 뒤 산세가 수려할 뿐 아니라 시가지가 관통되어 동남으로 누각이 즐비하고 시가지에 상품이 풍성하며 주위 경관이 아름다웠다 한다. 특히 중앙지대에 큰 은행나무가 서 있었으며 그 옆에 십동육간(十棟 六間)이나 되는 큰 정자가 있어 4개 대문이 나 있었다 하며 은행나무 그늘에 가리워진 정자라 하여 그 이름을 은행정(銀杏亭)이라 불렀다 한다. 상산지(常山誌)에 은행정에 관한 시(詩)가 있기에 그 뜻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훌륭한 경개(景槪)는 옛날 진천을 다시 봐야 하겠는데 높이 솟은 정자는 군과 성이 연(連)했도다. 몇백 년이나 버려두었던 유한한 이 땅이 하루 아침에 별천지가 되었구나 아름답게 단청을 하였으니 사방이 훤한데 강산이 지금부터 생색을 하게 되었으니 선인(仙人)이 너울너울 날라와서 여기 앉아있는 듯. 1913년 이곡면(梨谷面)과 월촌면(月村面)이 합치어 이월면(梨月面) 이 되었다.

 

중산리(中山里)

 

중복(中湺)마을

 

중복마을을 중복개라 한다. 원은 중보(中湺)게가 중복(中湺)개로 변한 것이다. 보(湺)란 논에 물을 대려고 뚝을 쌓고 흘러가는 냇물을 잡아두는 곳, 즉 봇물을 말한다. 옛날 수리사업의 하나로 동성리(東城里) 성평(城坪)들의 영농을 위하여 이곳에 보(湺)를 막은 일이 있다. 이에 연유하여 중복개가 된 것이다. 중보라 한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윗보(上湺), 아랫보(下湺)가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1600년대에 청주 이씨가 내주(來住)하여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30여 호 가구에 청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1920~1940년대에는 중복개를 중심으로 한 들 가운데 시베리아 방면에서 재두루미가 수천 마리씩이나 날아와 장관을 이룬 일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13호로 지정이 되었으나 지금은 해제되었다. 또한 이 마을 이창호(李昌鎬) 씨 댁 미루나무에 송아지만한 황새(鶴) 한 쌍이 매년 날아와 번식하였으나, 이것마저 한 마리가 폐염으로 죽고나서 오지 않게 되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것이 해제되고 말았다.

 

도산(刀山)마을

 

도산마을을 갈미 또는 칼산이라 한다. 원(源)은 옛날에 마을 뒷산이 칡으로 덮여 있어 칡 갈 (葛) 자를 써서 갈산이라 하고 칼산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마산(馬山)마을

 

마산마을을 말미라 한다. 옛날에는 말뫼 또는 말메라 불렀다. 어떤 유명한 장군이 말을 타고 가다가 이 산에서 쉬었다 하여 지은 지명이다. 이런 예(例)는 도처에 많이 있다.

 

동성리(東城里)

 

성평(城坪)마을

 

성평마을을 잿들이라 한다. 1600년 경에 형성된 마을이며 뒷산이 길게 성(城)을 쌓아놓은 것 같으며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전개(展開)된다. 이에 연유하여 재 성(城) 자와 들 평(坪) 자를 써서 성평이라 하였다. 이 재 너머에 학성초등학교가 있으며 진천군 내 급식 시범학교로 다대한 성과(成果)를 올리고 있다.

 

자래(自來)마을

 

자래마을을 "자네실" 이라 하고 동남쪽 200m 지점의 마을을 "동실이(東谷)"라 한다. 옛날 한양(서울) 다니는 큰 통로이기에 오고가는 길손과 선비들이 동네 느티나무 밑에 와서 쉬어가게 마련이다. 또 여행자들의 참(站)을 대는 목표지이기도 하며 숙박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스스로 찾아 온다하여 스스로 자(自) 자와 올 래(來) 자 집 실(室) 자를 써서 자래실이라 하던 것이 어느덧 자네실로 변하였다. 동곡(東谷)마을은 여행자들이 쉬어가는 곳이 있다 하여 동실(東室)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1900년경에 경주 김씨가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길손들의 목표물이었던 느티나무는 지금도 혼자만이 옛이야기를 간직하고 그 위풍과 노령을 자랑하고 보호를 받고 있다. 30여 호의 가구에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삼용리(三龍里)

 

삼용이란 지형상으로 보아 용이 3마리라는 뜻이다. 그 중 하나가 용사(龍寺)마을(상용, 上龍)이요, 중용(中龍)은 흔터(현재는 마을이 없어졌음)이고, 하용(下龍)은 청용(靑龍) 말을 한다고 한다. 이 삼룡의 지혈(地穴)에 묘(墓)를 쓰면 자손만대(子孫万代)에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고 수복강녕(壽福康寧)한다는 것이다. 현재 두 곳은 자리를 찾아 이미 묘지화 되었고, 한 자리는 아직도 지혈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1500년경에 경주 정씨(慶州鄭氏) 들이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하더니 해주 오씨(海州吳氏)들이 들어오고 다음에 하음 봉씨(河陰奉氏), 장연 노씨(長淵盧氏)들이 들어와 자연마을을 형성하게 되어 현재도 그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용사(龍寺)마을 용사마을을 과거에는 상용(上龍), 지금은 용절이라 한다. 옛날에 이곳에 절(寺)이 있어 그 절이름이 용사(龍寺), 즉 용절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40여 호 가구에 경주 성씨와 죽산 박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고 특산물로는 미곡을 위시하여 담배, 고추다.

 

내기(內基)마을

 

내기마을을 안터라 한다. 1500년대에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내거하여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인심이 좋아 살기 좋은 마을로 안터라 불리어오고 있다. 따라서 안 내(內) 자와 터 기(基) 자를 써서 내기라 칭하게 되었다. 40여 호 가구에 정씨와 봉씨(奉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수곡(水谷)마을

 

수곡마을을 물구리라 한다. 계곡에서 항시 물이 흘러 문전옥답(門前玉畓)에 항상 물이 있어 "물 구레"라고 하더니 어느덧 물구리로 변하고 말았다. 20여 호 가구에 해주 오씨와 장연 노씨들이 대성을 이루고 있다.

 

장괴(長壞)마을

 

장괴마을을 장겨리라고 부른다. 원은 장괴가 장겨리로 변한 듯하다. 글자를 풀면 긴느티나무라는 뜻이다. 옛날 이곳에 강당(講堂)이 있던 곳으로 절 근처에 강당이 있어 신도(信徒)들이 모여 불경에 대한 강의를 받았던 것이다. 또한 이 마을은 학성초등학교 전신이었던 이월초등학교 부설 삼용 간이학교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청용(靑龍)마을

 

청룡마을을 청룡말이라 한다. 옛날에는 하룡(下龍)이라 하였다. 삼용중에 한마리의 용이 청용마을에 위치했다. 청룡말은 30여 호 가구에 경주 정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물구리(水谷) 장거리, 청용말을 합쳐 수청(水靑) 이라 부른다.

 

신월리(新月里)

 

월촌(月村)마을

 

월촌마을을 다래촌이라 한다. 달래(月來)촌이 다래촌으로 변했을 것이다. 세조대왕(世祖大王 1455년) 때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월촌면 소재지로서 비교적 다른 마을보다 먼저 발전되었으나 1913년에 이곡면과 월촌면(月村面)을 합쳐 이월면이 되면서 면소재지는 송림리 시장터로 옮기게 되었다. 이 지방의 지형이 둥근 달의 형국이라 하여 달래촌(月村)이라 한다. 다래촌 개울을 중심으로 동, 서, 북으로 나누어져 서쪽 부락을 양달말 동쪽 마을을 음달말이라 한다. 양달말에 해가 비출 때는 자연 동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음달말은 음달이 되기 마련이다. 이에 연유하여 양달말, 음달말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열마지기는 옛날 그곳에 논 열마지기가 있어서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그대로 열마지기라 부른다. 조선시대에 다래촌마을이 청송 심씨(淸松沈氏) 집안에 교리(校理…從五品) 벼슬을 한 분이 있었는데 근방에서 이 분을 찾아 뵈올때는 동네 입구에서 하마(下馬)하여 기어올라가 배알(拜謁)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음달말 동남쪽 산넘어에 다래촌 방죽이 있고 그 동쪽으로 몇 집이 있는데 여기가 또한 강당말이라 한다. 물론 옛날에 강당이 있었기에 강당말이라 한다.

 

도종(道宗)마을

 

도종마을을 되마루라 한다. 새로 생긴 되마루를 새되마루라 하며 신도종(新道宗)이라 한다. 옛날 현 방죽거리에 유명한 주막(酒幕)이 있었는데 이 주막은 큰 길목이 되어 오고가는 나그네가 많을 뿐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서 이 주막에 늘 퇴마루가 밖에 놓여 있어 길손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주막거리 퇴마루는 일약 유명하게 되었으며 이에 연유하여 동명도 퇴마루라 하더니 되마루로 변하였다 한다. 또 한 설은 되마루 뒷산을 매봉산이라 하며 이 산에 절이 있었고, 산마루에서 불교 신자 세사람이 늘 도를 닦으려고 꿇어 앉아 기도를 하였다. 도를 닦는 산마루를 연상하여 도마루, 되마루가 된 것이라 한다. 따라서 길 도(道) 자 마루 종(宗) 자를 써서 도종(道宗)이라 칭한다.

 

신정(新定)마을

 

신정마을을 정착촌(定着村)이라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과 집을 등지고 피난민이 밀려닥쳐 1952년 10월에 정부에서 난민 정착사업을 실시하여 신월리 일대에 산재(散在) 100여 호가 정착 입주하였다. 이곳 상신 초등학교 옆에 정착촌이 이루어졌으니 신정마을이다.

 

미잠리(美蠶里)

 

잠두(蠶頭)마을

 

잠두마을을 누에머리라 한다. 이곳 지형이 잠두형(蠶頭形), 누에머리와 같다 하여 잠두마을이라 하였다.

 

미정(美定)마을

 

내촌리(內村里)

 

내촌(內村)마을

 

내촌마을을 당골이라 한다. 옛날에는 내당마을이라고 하였다. 당(堂)이라 하면 집 당 자이니 옛날 어떤 큰 건물이 있었던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내력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30여 호 가구에 문화 류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신대(新垈)마을

 

신대마을을 새터라 한다. 또는 새터말이라 한다. 이마을은 옛날부터 새로 지을 집터가 많다고 하여 새터, 새터말이라 하였다. 마을이 형성되기는 역사가 길지 않다.

 

신촌(新村)마을

 

이 마을은 난민 정착촌으로 30여 호 가구에 인구 150여 명으로 굳센 의지와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고 희망에 벅차 있다. 서울 가는 도롯가에 위치하며 신촌이라 한다.

 

근어(謹語)마을

 

조선 시대에 어느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학문도 많이 아는 학자요, 또 묘자리와 집자리를 잘 보는 풍수였다. 그는 자기 동네에서 임금이 탄생하는 좋은 자리가 있다 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그리하여 근방 사람이 임금이 탄생할 마을이라 하여 왕곡(王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해에 풍수는 아들을 낳았다. 그제야 쇠를 놓고서 자기 집자리를 살피더니 무릎을 탁 치면서 "우리 집 자리가 임금이 날 자리인데 오늘에야 알았구나!" 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자기 아들의 상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오! 내 아들이 임금이 될 상(相)이로구나" 하면서 매우 기뻐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임금이 났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점점 장성하여 소년 시절이 되자 열심히 공부를 가르쳤다. 머리가 민첩하기에 공부도 잘 하였다. 근방에 있는 학자들이 자주 놀러 오면 손님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가 "내 아들 저놈이 임금이 될 상을 타고 났어! 공부를 시켜 보니 재주도 있고 의견도 넓고……" 한다. 그러면 모두들 "얼굴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그것도 그럴 듯한 이야기여!" 하면서 몇 해 동안을 지냈다. 이런 이야기는 퍼지기 시작하여 관가에서까지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이를 어이 하리오? 포졸(捕卒 ~ 지금의 경찰관)들이 몰려 와서 풍수의 집을 에워 쌌다. 주인과 그의 아들은 묶이어 갔다. 풍수의 부인은 몇 해 동안 주인과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은 임금의 아들을 두었다하여 자랑도 많더니 이제는 망해버리고 말았다 하면서 동네 이름을 망골(亡谷)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근방에 있는 학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풍수는 본래부터 입이 너무 가볍더니 화를 입고 말았구나, 말을 조심해야지 하면서 근어(謹語) 즉 말을 조심해야한다 하면서 근어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 시대에는 역적으로 몰리게 되거나 음모, 즉 유언비어를 퍼뜨리다가 벌을 받으면 성까지도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이야기가 여기저기 전하고 있지마는 성명조차 전하지 않고 있다. 이 풍수 역시 연대나 성명은 전혀 전하지 않고 있다.

 

사당리(沙堂里)

 

사당(沙堂)마을

 

사당마을을 관지미라 한다. 옛날에는 이곳에 절이 있었다. 지금은 절이 없어졌지마는 절 밑으로 조그마한 샘이 있었는데 샘 이름을 관지미라고 하여 동명도 관지미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 관지미 샘물이 흐르는 계곡이 절 사(寺) 자 집 당(堂) 자 사당골이라 했는데 이로 연유하여 사당(寺堂)이 사당(沙堂) 으로 변하였다. 마을의 연대는 5ㆍ600년으로 추정되며 20여 호에 나주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사산(沙山)마을

 

사산마을을 살천이라 부른다. 미호천 상류의 모래가 이 곳에 많이 쌓여 산을 이룬다 하여, 사산(沙山)이라 칭하게 되었다. 20여 호에 경주 김씨들이 대성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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